두 회사가 시가총액이 같습니다. 한 곳은 현금이 10조원 있고, 다른 곳은 빚이 10조원입니다. 두 회사의 몸값이 같을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그런데 PER은 이 차이를 전혀 반영하지 않습니다.
EV — 회사를 통째로 살 때의 값
EV(기업가치) = 시가총액 + 순부채이고, 순부채 = 이자 붙는 빚 − 보유 현금입니다.
회사를 통째로 인수한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주식을 다 사려면 시가총액만큼 듭니다. 그런데 그 회사에 빚이 있으면 내가 갚아야 하고, 현금이 있으면 내 것이 됩니다. 그래서 빚은 더하고 현금은 뺍니다. 현금이 빚보다 많으면 순부채가 음수(순현금)가 되고, EV가 시가총액보다 작아집니다.
한국 상장사 47%가 순현금
저희가 계산해 보니 순부채를 산출할 수 있는 2,479종목 중 1,175종목(47%)이 순현금이었습니다. 절반 가까운 회사가 빚보다 현금이 많습니다.
| 종목 | 시가총액 | 순현금 | 순현금 / 시총 |
|---|---|---|---|
| LG화학 | 18.4조원 | 9.9조원 | 약 54% |
| 기아 | 52.2조원 | 11.7조원 | 약 22% |
| LG전자 | 28.5조원 | 7.5조원 | 약 26% |
LG화학은 시가총액 18.4조원인데 순현금이 9.9조원입니다. 회사를 통째로 사면 그중 약 54%가 현금으로 돌아오는 셈이라, 실제 사업에 지불하는 값은 시가총액보다 훨씬 작습니다. PER만 보면 이 부분이 전혀 안 보입니다.
순현금이 시가총액을 넘는 회사도 있다 2026-08-19 종가 기준
비중을 기준으로 다시 세워 보면 더 극단적인 사례가 나옵니다. 시가총액 3,000억원 이상인 종목만 추려 순현금 ÷ 시가총액을 계산한 결과입니다.
| 종목 | 시가총액 | 순현금 | 순현금 / 시총 |
|---|---|---|---|
| 세아제강지주 | 0.41조원 | 0.66조원 | 161.4% |
| 나이스정보통신 | 0.31조원 | 0.33조원 | 108.6% |
| GS건설 | 2.99조원 | 3.02조원 | 100.8% |
| 하림지주 | 1.20조원 | 1.11조원 | 92.5% |
| 이노션 | 0.76조원 | 0.58조원 | 76.2% |
숫자만 보면 “회사를 다 사면 안에 든 현금이 그보다 많다”가 됩니다. 그러나 이 자체가 저평가의 증거는 아닙니다. 지주회사라면 그 현금은 자회사 쪽에 묶여 있어 지주 주주에게 곧바로 오지 않고, 건설사라면 공사 선수금처럼 앞으로 써야 할 돈이 현금 계정에 잡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제 대행업이라면 가맹점에 넘겨줄 정산 자금이 회사 현금으로 계상됩니다. 그래서 EV는 “이 현금이 누구 것이고 언제 쓸 수 있는 돈인지”를 재무제표 주석에서 확인한 다음에 의미가 생깁니다. 저희가 순현금 자체를 두고 우열을 매기지 않는 이유입니다.
반대편 — PER은 싼데 EV로 보면 안 싼 회사
EV가 진짜 힘을 발휘하는 건 순현금이 아니라 순부채가 큰 쪽입니다. 2026-08-19 기준 현대차의 실적 PER은 8.97배로 시장 중앙값(13.06배)보다 낮습니다. 그런데 순부채가 158.15조원이라 EV는 242.92조원으로 시가총액 84.77조원의 세 배 가까이 됩니다. 같은 회사의 EV/EBIT은 23.47배입니다. PER과 EV 기준 지표가 정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셈입니다.
다만 이 숫자는 “빚이 많아 위험하다”로 곧장 읽으면 안 됩니다. 완성차 회사의 부채 대부분은 할부·리스 금융(캡티브 금융) 자산에 대응하는 차입금이라, 제조 사업의 빚과 성격이 다릅니다. 금융 부문을 떼어 보지 않으면 EV가 과대 계산됩니다. EV는 만능 보정이 아니라, 무엇이 부채로 잡혔는지 확인하게 만드는 장치에 가깝습니다.
SK(034730)도 같은 구조입니다. 시가총액 39.95조원에 순부채 46.99조원이 더해져 EV가 86.94조원입니다. 지주회사 연결 재무제표에는 자회사 차입금이 전부 합산되기 때문에, 지주 종목을 EV로 볼 때는 업종마다 봐야 할 지표가 다른 이유에서 다룬 NAV 관점을 함께 봐야 합니다.
EV/EBITDA와 EV/EBIT
- EBIT(영업이익) — 본업으로 번 이익
- EBITDA — 영업이익 + 감가상각비. 설비가 많은 회사는 회계상 감가상각비가 크게 잡혀 이익이 작아 보이는데, 실제로 나가는 현금은 아닙니다. 그걸 되돌려 현금 창출력에 가깝게 본 값입니다.
- EV/EBITDA = EV ÷ EBITDA — “회사를 통째로 사면 현금흐름 기준 몇 년치인가”에 가깝습니다.
EV/EBITDA가 유용한 상황은 분명합니다. 빚 규모가 크게 다른 회사들을 비교할 때, 그리고 설비투자가 많은 장치산업(통신·철강·조선·정유 등)에서입니다. 이런 업종은 감가상각비 때문에 PER이 실제 현금 창출력보다 나쁘게 보이기 쉽습니다.
FCF수익률 — 실제로 손에 쥐는 돈
회계상 이익과 실제 현금은 다릅니다. FCF(잉여현금흐름) = 영업활동 현금흐름 − 설비투자로, 회사가 사업을 유지하고도 남긴 진짜 여윳돈입니다.
FCF수익률 = FCF ÷ 시가총액은 “시가총액 대비 몇 %의 현금을 벌어들이는가”를 뜻합니다. 은행 예금 이자율과 비슷한 감각으로 읽을 수 있어 직관적입니다. 다만 설비투자 시기에 따라 해마다 크게 흔들리므로 한 해 값만 보면 안 됩니다.
실제로 마이너스가 흔합니다. 2026-08-19 기준 LG화학의 FCF수익률은 −29.9%, 현대차는 −20.1%였습니다. 둘 다 적자 기업이라서가 아니라, 전지·전동화 설비와 캡티브 금융자산에 현금이 크게 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KT는 +33.9%, 한국전력은 +25.0%였습니다. FCF수익률은 “좋고 나쁨”보다 “지금 이 회사가 투자 국면인가 회수 국면인가”를 알려 주는 값에 가깝습니다.
숫자를 직접 따라가 보기 — 삼성전자
공식만 보면 추상적이니 실제 수치로 한 번 계산해 보겠습니다. 2026-08-19 종가 기준입니다.
- 시가총액 1,446.95조원, 순부채 −32.62조원(현금이 빚보다 32.62조원 많음)
- EV = 1,446.95 − 32.62 = 1,414.34조원 — 시가총액보다 32.62조원 작습니다.
- 최근 12개월 영업이익(EBIT) 94.15조원 → EV/EBIT = 1,414.34 ÷ 94.15 = 15.02배
- 감가상각비(D&A) 48.10조원을 더한 EBITDA는 142.25조원 → EV/EBITDA = 9.94배
같은 회사의 실적 PER은 32.69배입니다. PER 32.69배와 EV/EBITDA 9.94배 사이의 거리가 순현금 32.62조원과 감가상각비 48.10조원이 만들어 낸 간격입니다. 반도체처럼 설비투자가 큰 업종에서 두 지표가 크게 벌어지는 것은 이상 신호가 아니라 구조입니다.
감가상각비는 현금흐름표가 요약형으로 공시되는 대형사에서 빠져 있는 경우가 있어, 저희는 전자공시의 XBRL 원본에서 해당 항목을 다시 찾아 채웁니다. 그렇게 해도 못 채우면 EV/EBITDA를 만들지 않고 비워 둡니다 — 2026-08-19 기준 EV/EBIT은 1,568종목, EV/EBITDA는 1,040종목에만 값이 있습니다.
PER과 EV 지표가 다른 답을 줄 때
두 지표가 엇갈릴 때가 가장 정보가 많은 순간입니다. 2026-08-19 기준 사례입니다.
| 종목 | 실적 PER | EV/EBIT | EV/EBITDA |
|---|---|---|---|
| SK텔레콤 | 51.54배 | 28.69배 | 5.63배 |
| POSCO홀딩스 | 38.56배 | 17.65배 | 5.67배 |
| 한국전력 | 2.32배 | 1.30배 | 0.65배 |
| 현대차 | 8.97배 | 23.47배 | 15.41배 |
앞의 세 곳은 PER은 높은데 EV/EBITDA는 낮은 유형입니다. 통신·철강·발전처럼 설비가 무거운 업종에서는 감가상각비가 이익을 크게 깎아 PER을 부풀립니다. 네 번째 현대차는 정반대로 PER은 낮은데 EV 기준으로는 높은 유형입니다. 앞서 본 순부채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EV/EBITDA가 항상 옳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습니다. 감가상각비를 되돌린다는 것은 설비를 언젠가 다시 사야 한다는 사실을 잠시 무시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설비 교체 주기가 짧은 업종에서는 EBITDA가 실제 여유 현금을 과장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EV/EBITDA·EV/EBIT·FCF수익률을 항상 같은 화면에 함께 놓습니다.
2026-08-19 기준 은행·보험·증권으로 분류된 126종목 전부에 EV 관련 지표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예금·보험부채가 사업의 재료 그 자체여서 ‘부채를 더한 몸값’이라는 개념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업종은 PBR·ROE를 먼저 보는 편이 맞습니다.
주의할 점
- 금융업에는 쓰지 않습니다. 은행·보험은 예금·보험부채가 사업 그 자체라 ‘부채를 더한다’는 개념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이런 업종에 EV 지표를 아예 표시하지 않습니다.
- 현금이 많다고 다 좋은 건 아닙니다. 쓸 곳을 못 찾아 쌓여 있는 현금일 수도 있습니다. 주주환원이나 투자로 이어지는지가 관건입니다.
- EBITDA는 만능이 아닙니다. 감가상각비를 빼고 보면 설비 교체 부담이 가려집니다. 설비투자가 계속 필요한 회사라면 FCF까지 함께 봐야 합니다.
각 종목의 EV·순부채·EV/EBIT·FCF수익률은 종목 페이지의 ‘기업가치(EV)’ 항목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계산식은 분석 방법론 5항에, 용어 정의는 용어 사전에 있습니다. PER 쪽 한계를 이익 시점에서 다룬 글은 예측 PER 완전 가이드입니다.
본 글은 공개 데이터를 정리한 정보 제공 자료이며, 특정 종목의 매수·매도 권유나 투자자문이 아닙니다. 언급된 종목은 설명을 위한 예시일 뿐 추천이 아닙니다. 투자 판단은 공시 원문을 직접 확인하고 본인 책임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데이터 출처
이 글의 수치는 금융위원회 주식시세정보·OpenDART·한국거래소 공개 데이터를 자체 전수 집계한 것입니다(계산식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