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은 주식의 값만 봅니다. 그런데 회사를 통째로 산다면 빚도 함께 떠안고, 금고에 든 현금도 같이 받습니다. 그 사정까지 넣은 자가 EV 배수입니다.

1. 기업가치(EV)란

EV = 시가총액 + 순부채. 순부채는 차입금에서 현금성 자산을 뺀 값입니다. 빚이 많으면 EV가 시총보다 커지고, 현금이 빚보다 많으면(순현금) EV가 시총보다 작아집니다.

EV/EBIT = 기업가치 ÷ 영업이익입니다. EBIT은 이자와 세금을 빼기 전 영업이익으로, 자본 구조와 무관한 본업의 벌이입니다. 그래서 빚이 많은 회사와 없는 회사를 같은 자로 잴 수 있습니다.

2. 한국 시장의 분포

6.7배하위 25%
12.1배중앙값
25.7배상위 25%
1,175곳순현금 기업

1,512종목에서 계산했습니다. 눈여겨볼 것은 순현금 기업이 1,175곳(47.4%)이라는 점입니다. 빚보다 현금이 많은 회사가 절반 가까이 됩니다.

3. 순위가 바뀌는 지점

시총 1,000억, 현금 400억, 빚 없는 회사를 생각해 봅시다. 영업이익이 100억이면 PER은 대략 10배 근처겠지만, EV는 600억이므로 EV/EBIT은 6배입니다. 현금을 빼고 나면 본업에 매겨진 값은 훨씬 쌉니다.

반대로 시총 1,000억에 순차입금이 1,000억인 회사라면 EV는 2,000억이라 같은 영업이익에도 EV/EBIT은 20배가 됩니다. PER만 보면 두 회사가 비슷해 보이지만 인수자 입장에서 드는 돈은 세 배 이상 차이 납니다.

한국 시장에 순현금 기업이 많다는 사실은, PER 순서와 EV 배수 순서가 자주 어긋난다는 뜻입니다. 현금이 두꺼운 회사는 EV 배수로 보면 눈에 띄게 싸집니다.

4. 실제로 얼마나 자주 뒤집히나

가정이 아니라 우리 데이터로 세어 봤습니다. PER과 EV/EBIT이 모두 계산되는 1,299종목 중 806곳(62.0%)에서 EV/EBIT이 PER보다 낮았습니다(2026-08 재집계). 순현금인 680곳만 보면 502곳이 그랬고, 순부채인 619곳 중에서는 315곳이 거꾸로 EV/EBIT이 PER보다 높았습니다. 현금이 많으면 EV 배수가 내려가고 빚이 많으면 올라간다는 규칙이 표본 전체에서 그대로 나타납니다.

개별 사례로 보면 더 뚜렷합니다. 기아(000270)는 PER 6.9배에 EV/EBIT 4.9배입니다. 순현금이 11.7조 원이라 인수자 관점의 값이 주식 시세보다 쌉니다. 같은 산업의 현대차(005380)는 PER 9.0배로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EV/EBIT은 23.5배입니다. 순부채가 158조 원으로 잡히기 때문입니다. PER만 보면 두 회사가 같은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빚을 넣고 보면 전혀 다른 자리에 있습니다.

단, 이 사례에는 함정이 하나 있습니다. 현대차의 순부채에는 자동차 할부금융을 하는 금융 자회사의 차입금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금융업의 차입은 원재료에 가까워 제조업의 빚과 성격이 다릅니다. 이 숫자를 그대로 제조업 배수로 읽으면 회사를 실제보다 훨씬 비싸게 보게 됩니다. EV 배수가 가장 크게 어긋나는 자리가 바로 이런 캡티브 금융을 낀 회사입니다. 참고로 삼성전자(005930)는 순현금 32.6조 원으로 EV/EBIT 15.0배, EV/EBITDA 9.9배입니다.

5. EBIT과 EBITDA의 차이

EBITDA는 EBIT에 감가상각비를 다시 더한 값입니다. 공장·설비가 많은 회사는 감가상각비가 커서 EBIT이 작게 나오는데, 이 비용은 실제 현금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 투자를 나눠 비용으로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치 산업 비교에는 EBITDA를 씁니다.

다만 감가상각을 무시한다는 건 설비 갱신에 드는 돈을 없는 셈 치는 것이기도 합니다. 투자가 계속 필요한 사업에서 EBITDA만 보면 실제보다 좋아 보입니다. 둘을 함께 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도 세어 봤습니다. 둘 다 계산되는 889종목에서 EV/EBIT은 EV/EBITDA의 중앙값 1.56배였고, 263곳은 2배가 넘었습니다. 감가상각비가 영업이익만큼 큰 회사가 그만큼 많다는 뜻입니다. 통신을 보면 분명합니다. SK텔레콤(017670)은 EV/EBIT 28.7배지만 EV/EBITDA는 5.6배, LG유플러스(032640)는 12.5배와 3.2배입니다. 망 설비의 감가상각이 영업이익을 크게 깎기 때문입니다. EV/EBITDA가 계산되는 1,020종목의 중앙값은 7.7배로, EV/EBIT 중앙값보다 한참 낮습니다.

6. 이 지표가 안 통하는 자리

영업이익이 마이너스일 때. 분모가 음수면 배수 자체가 뜻을 잃습니다. 전체 2,653종목 중 EV/EBIT이 계산되는 것이 1,506곳뿐인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매출 기준인 EV/Sales·PSR이나 자산 기준 지표로 갈아탑니다.

금융업. 은행·증권·보험에서 차입은 갚아야 할 빚이라기보다 사업의 원재료입니다. 순부채를 시가총액에 더하는 계산이 성립하지 않아, EV 배수를 쓰지 않습니다.

지주회사. 연결 재무제표에는 자회사의 이익과 부채가 함께 들어오는데 지분율은 100%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분자와 분모의 주인이 어긋나 배수가 실제보다 낮거나 높게 나옵니다(지주회사 할인 참고).

리스부채. 회계 기준상 임차료가 부채로 잡히면서, 매장이나 항공기를 많이 빌려 쓰는 유통·항공·운송의 순부채가 예전 기준보다 커 보입니다. 같은 회사라도 옛 자료의 EV 배수와 지금 값을 그대로 비교하면 안 됩니다.

정리

순현금 기업이 실제로 어디에 몰려 있는지는 순현금 기업에, 계산식은 분석 방법론에 정리돼 있습니다.

본 글은 공개 데이터를 정리한 정보 제공 자료이며, 특정 종목의 매수·매도 권유나 투자자문이 아닙니다. 언급된 종목은 설명을 위한 예시일 뿐 추천이 아닙니다. 투자 판단은 공시 원문을 직접 확인하고 본인 책임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데이터 출처

이 글의 수치는 금융위원회 주식시세정보·OpenDART·한국거래소 공개 데이터를 자체 전수 집계한 것입니다(계산식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