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 15배면 비싼 편"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런데 업종을 나눠 보면 같은 15배가 어떤 업종에서는 상위 10%이고 다른 업종에서는 평균 이하입니다. 8종목 이상인 44개 업종의 PER 중앙값을 전부 계산해 봤습니다.
1. 가장 낮은 업종과 가장 높은 업종
| 낮은 업종 | PER 중앙값 | 높은 업종 | PER 중앙값 |
|---|---|---|---|
| 자동차부품 | 6.2배 | 증권·금융지원 | 60.9배 |
| 영상·음향기기 | 6.2배 | 부동산 | 56.0배 |
| 전력·가스 | 6.7배 | 연구개발 | 52.5배 |
| 건설 | 6.9배 | 로봇 | 42.1배 |
| 의복 | 7.1배 | 전문·기술서비스 | 28.1배 |
| 지주 | 8.3배 | 반도체 | 26.8배 |
아래위 차이가 거의 열 배입니다. 시장 전체 중앙값 13.2배를 기준으로 삼으면, 자동차부품 회사는 거의 다 '싸고' 반도체 회사는 거의 다 '비싼' 것으로 분류됩니다. 그건 밸류에이션 판단이 아니라 업종 분류를 다시 말한 것에 가깝습니다.
2. 낮은 쪽에 몰린 업종의 공통점
PER이 낮은 업종은 대체로 이익이 오르내리거나 성장이 느립니다. 자동차부품·건설·의복은 전방 산업의 물량과 경기에 실적이 따라갑니다. 좋은 해의 이익으로 나누면 PER이 낮게 나오고, 시장은 그 이익이 계속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값을 더 얹지 않습니다.
전력·가스는 요금이 규제되는 산업이라 이익이 크게 늘기 어렵고, 지주회사는 자회사 지분 가치가 그대로 반영되지 않는 지주사 할인이 오래 붙어 있습니다.
3. 높은 쪽은 왜 높은가
높은 업종은 이유가 갈립니다. 연구개발·로봇은 지금 이익이 작아 분모가 작기 때문에 배수가 커집니다. 이익 1억을 내는 회사는 시총 100억만 돼도 PER 100배입니다. 성장 기대가 값에 들어간 면도 있지만, 이익이 아직 본격화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숫자를 밀어 올립니다.
부동산·증권·금융지원은 이익이 자산 평가나 시장 상황에 따라 크게 흔들립니다. 이익이 바닥인 해에 계산하면 PER이 치솟습니다. 이런 업종에서 높은 PER은 "비싸다"가 아니라 "지금 이익이 낮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4. 중앙값 60배의 정체 — 표본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나
여기서부터는 2026-08 하순 스냅샷을 다시 집계한 값입니다(위 표는 08-06 기준이라 소수점 자리가 조금 다릅니다). 재집계에서 증권·금융지원 업종의 PER 중앙값은 61.7배였습니다. "증권업이 비싸다"로 읽고 싶어지는 숫자인데, 이 업종에 속한 67종목 가운데 63곳이 이름에 '스팩' 또는 '기업인수목적'이 들어간 회사입니다.
스팩은 합병할 회사를 찾을 때까지 공모 자금을 예치해 두는 껍데기 회사라 손익계산서에 잡히는 것이 사실상 이자수익뿐입니다. 시가총액은 100억원 안팎인데 연간 이익은 몇 억원이니 PER은 자동으로 50~80배에서 계산됩니다. 재집계 기준 이 업종의 1사분위가 56.0배로 중앙값과 거의 붙어 있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표본 대부분이 같은 구조의 회사이면 분포가 좁게 뭉칩니다. 업종 중앙값 61.7배는 밸류에이션이 아니라 표본 구성을 말해 주는 숫자입니다.
부동산도 같습니다. 재집계에서 부동산 업종 27종목 중 21곳이 이름에 '리츠'가 붙은 부동산투자회사였습니다. 리츠는 이익의 대부분을 배당으로 내보내도록 설계된 구조라 이익 규모 자체가 작게 남고, 그래서 PER이 크게 나옵니다. 리츠를 볼 때 시장이 실제로 쓰는 자는 PER이 아니라 배당수익률과 순자산가치입니다.
5. 업종 안의 격차가 업종 사이 격차보다 크다
업종 중앙값만 나열하면 "업종만 알면 된다"는 인상을 주는데, 데이터는 반대입니다. 같은 재집계에서 업종 내부의 1사분위·중앙값·3사분위를 함께 뽑아 봤습니다.
| 업종 | 표본 | 1사분위 | 중앙값 | 3사분위 |
|---|---|---|---|---|
| 자동차부품 | 76곳 | 3.9배 | 7.0배 | 23.0배 |
| 화학 | 114곳 | 9.3배 | 15.2배 | 27.9배 |
| 제약·바이오 | 95곳 | 7.7배 | 14.1배 | 30.4배 |
| 반도체 | 28곳 | 16.1배 | 26.9배 | 49.2배 |
자동차부품은 3사분위가 1사분위의 약 5.9배입니다. 업종 중앙값 사이의 열 배 격차 못지않게, 같은 업종 안에서도 위아래가 벌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이 회사는 자동차부품이니까 6배대가 맞다"는 식의 추론이 성립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업종 중앙값은 비교의 출발선이지 결론이 아닙니다.
6. 분모가 사라진 업종 — 중앙값에 들어가지 못한 회사들
PER은 이익이 플러스일 때만 계산됩니다. 그래서 업종 중앙값은 그 업종의 흑자 회사만 모아 만든 값입니다. 재집계에서 업종 전체 종목 수와 PER이 실제로 계산된 종목 수를 나란히 놓으면 차이가 큽니다.
- 반도체 — 70곳 중 PER 계산 가능 28곳(40%)
- 연구개발 — 67곳 중 10곳(15%)
- 로봇 — 25곳 중 8곳(32%)
- 게임·소프트웨어 — 157곳 중 80곳(51%)
로봇 업종의 PER 중앙값 52.0배는 흑자인 8곳만의 중앙값입니다. 나머지 17곳은 애초에 이 숫자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적자 회사가 많은 업종일수록 "업종 PER"은 실제 업종의 모습과 멀어집니다. 어느 업종에 적자가 몰려 있는지는 적자 기업 994곳은 어느 업종에 있나에 정리했습니다.
7. PER은 지나간 이익으로 만든 숫자다
확정 PER의 분모는 이미 끝난 4개 분기의 이익입니다. 이익이 크게 움직이는 회사에서는 이 숫자가 현재 상태를 늦게 반영합니다. 재집계 스냅샷에서 삼성전자의 확정 PER은 32.7배였지만 올해 예상 이익으로 계산한 예측 PER은 5.0배였고, SK하이닉스는 24.9배와 4.4배였습니다. 같은 회사, 같은 날 주가인데 분모를 무엇으로 두느냐에 따라 여섯 배 넘게 벌어집니다.
그래서 반도체 업종 중앙값이 높게 나왔다고 해서 그것을 곧바로 '비싸다'로 옮길 수 없습니다. 다만 반대로 예측 PER이 낮다는 것도 그 자체로는 결론이 아닙니다 — 예측은 검증되지 않은 추정이고, 무엇이 이익을 그만큼 늘리는지 확인이 필요합니다. 두 숫자의 간격을 읽는 방법은 예측 PER이 확정 PER보다 낮은 종목이 83%와 예측 PER이란 무엇인가에서 다룹니다.
8. 흔한 오해 셋
"PER이 낮은 업종을 고르면 유리하다." 낮은 PER은 시장이 그 이익의 지속성을 낮게 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경기 정점의 이익으로 계산된 저PER은 다음 해에 분모가 줄면서 저절로 사라집니다. 낮음의 이유를 확인하지 않은 저PER은 정보가 아닙니다.
"업종 중앙값보다 낮으면 싸다." 앞의 5번에서 봤듯 업종 안의 폭이 넓어, 중앙값 아래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회사가 동종 대비 어디쯤인지 알 수 없습니다. 같은 업종이라도 사업 구조·수익성·부채가 다르면 배수가 달라야 정상입니다.
"업종 PER이 높으면 그 업종은 성장주다." 4번의 스팩 사례처럼 분모가 작아서 생긴 숫자일 수 있습니다. 배수를 볼 때는 분모가 무엇인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9. 그래서 업종별로 자를 바꿔 댄다
저희는 종목마다 그 업종에서 먼저 봐야 할 지표를 정해 상세 페이지 맨 위에 띄웁니다. 이익이 안정적인 성숙 산업은 PER, 자산이 사업의 본체인 금융·지주는 PBR, 빚과 현금을 함께 봐야 하는 장치 산업은 EV 배수를 우선합니다. 적자이거나 매출 성장 단계인 회사는 이익 기반 지표가 의미를 잃으므로 그렇게 표시합니다.
기준은 분석 방법론에 공개돼 있고, 같은 업종 안에서 비교하도록 업종 중앙값을 함께 보여 줍니다. 지표 이름이 낯설다면 용어 사전과 업종마다 봐야 할 지표가 다른 이유를 먼저 보셔도 좋습니다.
정리
- 44개 업종 PER 중앙값은 6.2배(자동차부품)~60.9배(증권·금융지원)로 열 배 가까이 벌어집니다.
- 낮은 쪽은 경기 민감·저성장, 높은 쪽은 이익 초기 단계이거나 이익이 바닥인 경우입니다.
- 증권·금융지원 67곳 중 63곳이 스팩, 부동산 27곳 중 21곳이 리츠 — 높은 중앙값은 표본 구성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 업종 안의 격차도 큽니다. 자동차부품은 3사분위가 1사분위의 약 5.9배입니다.
- 적자가 많은 업종의 PER 중앙값은 흑자 회사만 모은 값이라는 점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 시장 전체 중앙값 13.2배를 모든 업종에 대면 업종 분류를 밸류에이션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본 글은 공개 데이터를 정리한 정보 제공 자료이며, 특정 종목의 매수·매도 권유나 투자자문이 아닙니다. 언급된 종목은 설명을 위한 예시일 뿐 추천이 아닙니다. 투자 판단은 공시 원문을 직접 확인하고 본인 책임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데이터 출처
이 글의 수치는 금융위원회 주식시세정보·OpenDART·한국거래소 공개 데이터를 자체 전수 집계한 것입니다(계산식 공개).